이력이 사라지는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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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력이 사라지는 날은
죽음일 것입니다.

그러나 또 다른 때도 있습니다.

“지금까지 한 번도 잘했다고 한적 없어요.”
배우자의 이런 말도 내 이력이 사라지는 때입니다.
그동안 해왔던 칭찬이 송두리째 날아가 버리기 때문입니다.

“너는 엄마한테 지금까지 뭘 해 줬는데?”
라는 엄마의 말도 자녀의 이력을 없애버리는 말입니다.
그동안 엄마한테 잘 보이려고 했던 일들이 사라지게 만드니까요.

“한 번도”
“지금까지”

이런 말을 잘 못쓰면 상대의 이력을 없애버리는 큰 잘못을 범하게 됩니다.
이런 말을 들으면 기운이 다 빠져나간 듯 맥이 풀립니다.

이런 경우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과 10년을 사랑했다가 헤어지고
다른 사람을 만나면
지난 10년이 사라지게 됩니다.

그것은 뒤에 만난 사람과
지난 10년간의 얘기를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참 슬픈 일입니다.
좋았던 일도 어려웠던 일도 말할 수 없으니까요.

이렇듯 이력이 사라진다는 것은
때로는 기운을 모두 빼앗겨버리고
때로는 참으로 슬프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력을 이어가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참 행복한 일입니다.

이방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