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것이 진짜 삶의 시간일까?

오늘, 꽤 오랜 친분이 있는 분이 내가 없는 사무실에 불쑥 찾아왔다. 상당한 친분이 있다고 생각해서인지 내 방에 들어가 컴퓨터를 켜고 일을 했던 모양이다. 이를 본 직원이 평소 같지 않게 떨떠름한 말을 몇 마디 한 것을 두고 그는 내게 전화를 해서 상한기분을 한동안 얘기한다. 회의 중이라는 말로 끊었지만 그 행동은 예의가 아님은 분명하다. 물론 내 시각으로 보면 그렇다.

며칠 전, 한 정부기관에서 회의를 했다. 그 기관은 취약업종의 산업화를 위하여 자금을 지원해 준 기관이다. 회의 중에 제안서에 충실해야 한다며 예산삭감이 있을 수도 있다고 했다. 그런데 그 삭감이유라는 것이 처음 자금지원을 신청할 때, 제안서에서 첫해 가맹점 모집 숫자를 제시했는데 그것을 그대로 지키라는 것이다.

첫해 지원금은 가맹점 수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시스템구축에 대부분이 들어가기 때문에 가맹점 숫자에는 별 의미가 없고, 특히 시스템 구축 후에는 가맹점 숫자가 몇 십개 늘어난다고 해서 그만큼 투자가 필요한 것도 아니기 때문에 타당하지 않는 지적이라고 해명했지만 막무가내다. 실제보다 형식에 더 큰 비중을 두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이건 분명 정책지원을 하는 기관의 자세가 아니다. 이것도 물론 내 시각으로 보면 그렇다.

인간은 초당 18~24개의 이미지를 보고 사실을 판단한다. 반면에 달팽이는 불과 4개의 이미지만으로 세상을 판단한다. 인간과 달팽이의 세상은 그래서 다르게 나타날 수밖에 없다. 흘러가는 시간이 각각 다르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빨주노초파남보의 일곱 색깔이 있다. 그런데 사실은 그 아래로는 자외선이라는 것이 있고, 위로는 적외선이라는 것이 또 있다. 벌(bee)은 바로 그 자외선으로 인간이 볼 수 없는 세상을 본다. 독수리는 높은 하늘에서도 땅위의 작은 토끼를 알아차리고 잽싸게 나꿔 채 간다. 인간보다 8배나 크게 볼 수 있는 천리안을 가졌기 때문이다.

인간, 달팽이, 벌, 독수리… 이들 모두는 같은 시대에 같은 세상에서 산다. 제각각 시간이 다르게 흘러가는 것뿐이다. 가시거리가 50cm밖에 안 되는 파리나, 초음파로 160km나 떨어져 있어도 대화가 가능한 돌고래 역시 보고 겪고 듣는 것은 다를지라도 같은 시대, 같은 세상에 산다.

곤충이나 동물들도 제각각 자기만의 영역에서 자기들만의 언어로 서로 다른 움벨트(umwelt)에서 살고 있는걸 보면, 인간도 생각의 차이에 따라서 서로 다른 세상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를 일이다. 각각 자신의 생각이 원칙이자 논리일 것이라고 믿고…

이방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