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노력을 쏟는 게 너무 아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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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중견기업의 지인이 페이스북에 이런 말을 남겼다.

“형식적인 것에 맞추는데 시간과 노력을 기울이는게 너무 아까워서 성격상 알맹이 없는 보고를 극도로 싫어하는데. 나이를 한살한살 먹을수록 자꾸 이런 일만 남고 맡겨진다;; 보고를 위해 하는 보고….왜 이럴수밖에 없는지 이해가 되긴 하는데.. 거기에 내 노력을 쏟는게 너무 아깝다.”

그래서 이글에 나는 이런 답글을 달았다.
“그렇게 나이가 들어가는 겁니다.”

어제 워크샵에서 한 교수와 점심을 먹다가 들은 얘기다. 그가 교수로 옮겨가기 전까지는 한 연구소의 연구원으로 일했다고 했다. 그때의 경험이란다.

처음에는 온갖 머리를 다 짜내서 보고를 합니다. 이를 받아 든 상급자가 살짝 훓어보고는 “이거는 다르게 고쳐봐” 합니다. 그러면 다시 있는 지식, 없는 지식을 갖다 붙여서 또 나름대로 근사하게 만들어 보고하죠. 그러면 또 다시 밑줄 몇 개 긋고는 “이렇게 고쳐야지 임마.”한답니다.

그래서 습관 하나가 생겼다고 했다. “일단 대충 적어서 보고를 합니다. 그럼 틀림없이 몇글자 적어서 내려옵니다. 그러면 거기에 맞춰서 또 몇자 고쳐 보고합니다. 두세번 반복하면 아주 쉽게 OK 사인이 나죠.

그러다 보니 뭘 올리는데 지식을 짜내지 않아도 되고, 그게 익숙해져서 나중에는 오히려 편해졌다고 한다. 내가 가진 새로운 아이디어보다 상급자의 입맛에 맞춰 서주는 것이 훨씬 편하다는 것이다.

지금부터는 내 의견이다. 가장 교과서적인 결론은 “그런 행태에 익숙해지면 나중에 스스로 해결할 역량을 잃게 된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공조직이 이런 류의 근무행태를 보인다. 그러다보니 퇴직 후에는 자신의 경험을 거의 살리지 못하고 전혀 다른 길을 가는 경우가 허다하다. 오랜경험을 살려서 해도 부족할 판에 새로운 분야에 도전해서 성공하기는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또다른 측면에서 보자. 상급자가 일을 많이 시키는 것은 그만큼 그 사람의 역량을 믿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적질이라는 것도 사실은 그 직원이 그만한 역량을 가졌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역량있는 하급자는 대부분 일을 많이 맡게되거나 지적을 당하기도 한다.

만일 도저히 역량이 안되는 직원이라면 그마저도 시키지 않고 지적도 하지 않는다., 답답해서라도 상급자가 그냥 스스로 해결하고 만다. 하급자 입장에서는 일이 줄어들어서 좋겠지만 그만큼 역량을 키울 기회를 잃게된다. 지금 근무하고 있는 직장에서 내려오는 일이 적어 한가하다고 생각되면 이미 역량이 다한 것이라고 보면 틀림없다.

그렇다면 윗글에는 왜 이렇게 말하지 않고, “그렇게 나이가 들어가는 겁니다.”라고 했는지 궁금할 것도 같다. 대부분의 조직생활에서 순응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어서다. “좋은 게 좋다.”고 생각한다는 것은 그만큼 나이가 들어가고 있다고 보면된다.

몇 해전에 한 지자체 고위직에 있는 한 사람이 기획재정부 사무관으로 임용된 청년 두명을 만나달라고 했다. 이제 시작하는 청년들이라 전문가의 조언을 해 주면 좋겠다고했다. 물론 결론은 “순응하지 말고 늘 처음처럼”이다. 지금처럼 여러 사람들의 의견을 경청해서 그 열정을 섞어 좋은 정책을 만들어 내라.“고 말이다.

그런데 수년이 지난 후, 그 친구들을 만났을 때는 처음에 만났을 때의 그 눈빛은 사라지고, 윗사람과 국회, BH등에 어떻게 하면 거슬리지 않게 업무를 수행하느냐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어쩌면 우리 사회가 이렇게 순응하는 인간으로 사는 방법을 강제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국회의원도 소신을 말하면 배척되고, 공무원도 소신껏 하면 따돌림을 당하기도 하니가 말이다. 요즘에는 이런 현상이 더욱 두드러진다. 다변화 사회에서 다양한 목소리가 생명인데 자꾸 줄세우기를 강요하는 풍토가 굳어지는 듯해서 심히 염려된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수직사회에서의 삶은 그렇게 길지 않고, 결국에는 ‘홀로 삶’이 훨씬 길다는 것이다. 그 때 내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느냐가 내 인생의 최종 캐릭터로 남는다. 그때가 돼서 준비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이방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