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할의 시대!

잠시 인생 타임라인에 나를 올려보자. “만일 당신이 20~30대라면 좋은 상사에게 일하는 법을 제대로 배우고, 30~40대가 되면 하고 싶은걸 그냥 해라. 만에 하나 실패하더라도 다시 일어설 기회가 있기 때문이다. 만일 당신이 40~50대라면 잘하는 것에 도전하고, 50~60대라면 다음세대 육성을 위해 해야 할 일을 해라. 60대가 넘어가면 당신의 손자들과 즐거운 시간을 가져라.” 알리바바 창업자 마윈이 한 말이다. 굳이 마윈의 말을 옮기지 않더라도 웬만큼 살아온 세대라면 이 말에 공감할 것이다.

다시 타임라인으로 돌아가 보자. 청년기에는 직업을 찾아 ‘직(職)의 사회’에 진입하고, 중년기에 한두 차례 위기를 겪은 후 새로운 일거리 즉, ‘업(業)의 사회’에 편입한다. 고용시장이 경직된 우리나라에서는 전직보다 대체로 창업에 도전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노년기로 올라서면 자의든 타의든 직업(職業)의 사회에서 ‘역할의 사회’로 갈아타야 한다. 여기에서 역할이란 ‘개인이 사회에서 차지하는 특정한 위치를 결정하는 수단으로서 사회에서 인정되는 포괄적인 행동 유형’을 말한다. 물질만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직(職)의 사회’에서는 고용계약에 의해 조종당하는 삶을 살아야 하고, ‘업(業)의 사회’에서는 투자를 해서 돈벌이를 위한 잠 못 이루는 경쟁을 벌여야 한다. 그러나 ‘역할의 사회’에서는 참여와 동행을 통해 같이 즐기는 지혜만 있으면 된다. 나이가 들어서도 돈벌이에 얽매이게 되면 위험이 상존하고 영혼이 혼탁해진다. 특히 중년이 후의 삶은 더욱 그러하다.

그렇다면 앞으로 왜 역할이 중요한지에 대해 답을 내놓아야 할 것 같다. 세계경제를 달구고 있는 4차 산업혁명 시대에는 대부분의 일이 역량을 합치는 이른바 협업(Co-Work)으로 가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개인의 역량이나 기술만으로는 사실상 어렵다. 융합과 연결이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같은 일을 반복해야 하는 ‘직업’보다 상황에 따라 연결하고 역량을 조합하는 이른바 ‘역할’이 필요하기 때문에 직업의 경계 자체가 없어진다.

여기에다 4차 산업혁명의 핵심기술인 인공지능(AI)은 시간과 지력을 지원해 준다. 이로 인해 얻게 되는 시간은 인간의 가치충전에 활용될 것이며 지력향상은 얕은 지식과 경험을 더욱 강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 더욱이 기계가 대신 일하고 얻은 물질적 이익은 사회적 복지라는 이름으로 작동하게 된다. 즉, 일개미가 아니라 베짱이로 살아도 그 역할이 협력과 동행의 가치를 가졌다면 적절한 생산적 소비와 복지혜택으로 사는 데 지장이 없다는 얘기다. 따라서 앞으로의 세상은 여하한 지점에서 사회적 역할을 할 수 있느냐가 삶의 가치를 가늠하는 잣대가 될 것이다.

지금 우리사 회는 코딩교육 열풍이다. 국민 모두를 기술직으로 만들려는 기세다. 물론 4차산업혁명시대의 기술은 더 이상 일부 사람들의 것은 아니고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기술은 우리 모두에게 영향을 미치고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환경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기술을 익혀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 기술 뒤에 어떤 사상과 철학이 있는지, 우리 사회를 어떻게 바꿀 수 있는지를 교양으로 이해하고 있으면 된다. 기술이 없더라도 메커니즘을 이해하고 있으면 가르칠 수 있고, 글을 쓸 수도 있으며 멘토링을 할 수도 있는 이른바 상황에 따른 역할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노인이 되면 일반적으로 네 가지 고통이 따라온다. 빈곤, 질병, 외로움 그리고 역할상실이 그것이다. 이 가운데 역할만 회복돼도 대부분 해결된다. 따라서 과거 직업이 일이 되고, 그 일이 취미가 돼서 취미나 놀이 같은 역할을 만들면 나이가 들어가도 윤기 있는 삶을 영위할 수 있을 것이다.

혹자는 즐기기 위한 일이나 취미는 돈이 되지 않아서 현실적이지 않은 소리라고들 한다. 이른바 사회적 역할만으로 생산적 활동이 어렵다는 얘기다. 과연 그럴까? 결론부터 얘기하면 자기만의 길, 즉 정향(定向)을 잘 설계하면 역할만으로도 돈이 된다. 예컨대 놀이를 즐기는 사람이라면 놀이 디자이너로서 어린이들과 잘 놀아주면 되고,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면 테라피와 융합해서 미술 테라피스트로 활동하면 즐기면서 그 대가를 받을 수 있다.

그렇다면 정향은 어떻게 설계해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를 풀어야 할 것 같다.

일반적으로 어릴 때 정향을 찾으면 그에 따라 직업을 갖고, 그 직업에서 얻은 경험을 바탕으로 창업하고, 이렇게 얻어진 노하우로 역할을 만들면 된다. 그러나 아직 방향을 정하지 못했을지라도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정향을 찾아내고 고도화할 수 있다.

필자에게 상담 온 창업자들의 첫 질문은 대체로 “요즘 뭐가 잘돼요?”다. 자기를 잘 모르기 때문에 질문에 자기는 빠져 있는 것이다. 필자는 그 질문에 대해 정답(正答)을 알려줄 수 없다. 필자는 그를 모르기 때문이다. 설사 안다고 해도 그가 가진 개인적 환경이 추천업종 창업조건과 다를 수 있어서다.

창업 상담을 시작한 최초 10여년 동안 필자도 트렌드 업종을 추천하는 데 대부분의 시간을 썼다. 이른바 정답(正答)을 필자가 정해준 것이다. 그런데 나중에 확인해 보면 그 업종을 그대로 창업한 사례도 많지 않았고, 실패라도 할라치면 그 원인을 다른 사람에게 전가하려는 사람도 많았다.

 

내가 정해야 그게 나의 길이다

이때 깨달았다. 다른 사람이 정해 준 길에는 열정과 책임감이 동행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이후부터 필자는 업종 추천보다 이야기를 듣는 것에 더 큰 비중을 두었다. 그 결과 사람들은 대화하면서 스스로 자기의 길을 찾았고, 그렇게 얻은 자신감으로 성공한 사례가 훨씬 많았다. 그들에게는 자기의 판단에 전문가가 동의해 주기를 바랐던 것이다. 더 놀라운 사실은 ‘콕 찍어줘서’ 창업한 사람보다 들어줘서 스스로 결정한 사람이 훨씬 고마워한다는 점이다. 이렇게 남이 정해 준 길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가 정해서 가는 길이 더욱 열정적이고 감동적이다.

그래서 ‘자기의 길은 자기가 정해야’ 한다. 필자가 여기에 확신을 갖게 된 것은 실제로 몇 차례 정향교육을 실행해 본 결과 놀라운 효과를 얻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수강생들은 일률적으로 한 가지 직업을 갖는 것이 아니라 각자 가고자 하는 방향을 찾아서 서로 다른 ‘역할’을 만들어 나갔다. 즉, 수강생이 40명이라면 그들이 각기 다른 일을 찾았다는 뜻이다. 이들이 갖게 된 일은 커리어 디자이너, 해외역사 기획가, 북아트 전문가, 놀이 디자이너, 사회적 기업가 등 취향에 따라 다양하다.

이제 ‘역할의 시대’에 그 역할을 갖기 위해 정향설계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답을 내 놓을 차례다. 정향을 찾아내고 고도화하는 방법은 크게 다섯 단계를 거친다. 캐릭터 발견하기, 구조 디자인하기, 콘텐츠 채우기, 개인 브랜드 알리기 그리고 조직화와 나눔 순이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자기의 캐릭터를 발견하는 일(Discover My Character)이다. 캐릭터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MBTI, 애니어그램 등 적성이나 성격검사를 할 수 있는 여러 도구가 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이런 도구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 너무 일반화된 직업으로만 분류되어 있어서 일의 다양성에 답을 주지 못할 뿐더러 한 가지 직업으로 규정해 버리는 우를 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캐릭터를 발견할 수 있을까? 먼저 잘하는 것과 몰입경험을 찾아 콘셉트 리스트를 만들어 보는 것이다. 여러 콘셉트 가운데 일이 아닌 놀이도 포함될 수 있고 관심 사항도 해당되기 때문에 많게는 20가지 이상 나올 것이다. 이렇게 나온 콘셉트를 자기가 추구하는 가치와 역량에 하나씩 대입해가다 보면 최종적으로 한두 가지 콘셉트로 요약된다. 이런 과정을 통해 결정된 콘셉트를 한 단어로 표현할 수 있는 캐릭터로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직종일 수도 있고 업종일 수도 있다.

다음으로는 결정된 캐릭터를 구조화(Structuring)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캐릭터는 무형이어서 보이지 않기 때문에 유형화, 즉 보이도록 틀을 짜야 하는 것이다. 구조화를 하면 전체를 볼 수 있는 눈이 생긴다. 더불어 원인과 결과의 메커니즘을 읽을 수 있고 각 요소의 특성까지 보인다.

구조화가 끝나면 그려진 구조에 맞는 콘텐츠를 채우는 일(Filling My Contents)이 필요하다. 콘텐츠를 채우려면 학습과 경험 등이 필요하지만 일련의 지식을 스스로 해결하기 어려울 때는 협업이나 제휴 등 이른바 인적·물적 네트워킹을 통해 보완해 나갈 수 있다.

다음 절차는 ‘내 브랜드 알리기(Promote my Brand)다. 아무리 출중한 지식으로 역량을 강화했다 할지라도 세상이 자기를 알아주지 않으면 무용지물이다. 음식이나 소매 같은 입지업종은 소비자가 지나가다가 눈에 보이면 사지만, 지식은 유형화된 캐릭터를 알리지 않으면 어디에 누가 있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때 필요한 사람이 멘토다. 자기의 방향을 정하고 구조화하고, 콘텐츠를 채웠지만 그렇게 완성된 캐릭터라도 세상에 노출되어야 비로소 소비자가 찾아온다. 그런데 구조화한 캐릭터가 대부분 이전에 경험한 시장과 거리가 있기 마련이어서 사회적 네트워크가 취약하다. 그래서 점프업(Jump Up)을 도와줄 멘토가 필요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조직화와 나눔(Organizing & Sharing)이다. 일반적으로 지식서비스는 각자도생하기가 어려운 점이 많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이 조직화다. 가치를 공유할 수 있는 사람들과 조직을 만들면 프로젝트를 만드는 데 용이하고 전파하기도 상대적으로 쉽다. 게다가 지식을 공유하며 고도화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물론 역할에 따라 업무를 분담하면 시너지효과가 더욱 커진다. 조직화의 유형은 상하관계나 계약에 의한 근로조건이 없는 협회나 조합이면 좋겠지만 포럼이라도 상관없다. 각자의 역량을 조합해서 시너지효과를 낼 수 있는 구조라면 족하다.

이 글을 읽는 것을 잠시 멈추고 클래식 한 곡을 들어보자. 라벨의 ‘볼레로’라는 곡이 있다. 처음에는 반복되는 리듬(Rhythm)에 언뜻 단조롭게 생각되기도 하지만 여기에 순차적으로 선율(Melody)을 붙이고, 화성(Harmony)을 넣고, 음색(Tone Color)을 가하면 끝은 장엄한 오케스트라가 된다. 방향만 맞다면 레이어(Layer)를 하나씩 추가해서 얼마든지 풍요로운 꿈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20년을 공부해서 기껏해야 평균 20년을 일하지만, 퇴직 후 살아야 할 기간은 둘을 합한 기간보다 더 길다. 대세를 지향하되 순응하지 말고 자기의 정답(正答)은 스스로 정해서(定答)’ 자기만의 역할로 세상의 중심에 서야 하는 이유다.

이런 차원으로 해석하면 서두에서 마윈이 주장하듯 “60대가 넘어가면 당신의 손자들과 즐거운 시간을 가져라”는 말은 틀렸다. 정향설계에 의해 직업을 넘어 ‘사회적 역할’을 찾는다면, 나이가 들어도 자존감을 높여주며 삶의 가치를 한층 귀하게 만들어줄 것이기 때문이다.

이형석

이 글은 최강 경제전문지 ‘이코노믹리뷰’에도 실었습니다.  http://기사 바로보기 http://www.econovill.com/news/articleView.html?idxno=340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