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고통은 너의 쾌락

젊은 시절, 국제회의대행업(Professional Convention Orgernizer)을 하다가 빚을 져서 압류를 당한 적이 있다. 보증금 5만원에 월세 5만원을 내며 어렵게 버티던 시절이었다. 울부짖는 아내를 집달관 3명이 팽개치듯 마루바닥에 내동댕이 치며 ‘빨간 딱지’를 붙였다.

가제도구라고 해봐야 작은 TV와 책걸상이 고작이었는데 신발을 신고 들어와 이불을 짓밟으며 다 붙이고 나서는 박수를 치듯 손을 털고 너털웃음을 지으며 사라졌다. 며칠이 지났을까? 경매가 시작됐고 낙찰가는 고작 3만원. 당장 먹는데 필요한 식기와 가리는데 필요한 싸구려 옷 몇벌, 그리고 책을 제외한 작은 소품까지도 다 가져 갔는데 7만원의 채무 가운데 3만원이 변제된 것이었다.

6개월이 지났다. 남은 4만원을 받기 위해 채권자가 또다시 압류를 했다. 우리는 더 이상 집달관들을 붙들고 애원하거나 울지 않았다. 아니 그럴만한 기력도 없었다. 차라리 내 육신을 압류해 갔으면 이보다 더 허망하고 슬프지는 않았을 것이다. 당시 집달관들과 입찰자들의 행동은 아직도 너무나 생생해서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다. 가누기 힘든 우리의 고통을 그들은 아주 태연하게 농담과 웃음을 섞어가며 “유흥처럼‘ 즐기고 있었던 것이다.

‘나의 고통’

그것은 분명 타인에게는 즐거움이었다. 신발을 신고 내 방에 들어서며 ‘집행자’의 쾌감을 느꼈을 것이고 울부짖는 아내를 밀치면서 그들은 ‘승리자’의 기분을 만끽했을 것이다. 입찰자는 거의 공짜로 얻은 기분에 ‘포만감’을 느꼈을 것이고 이를 바라보던 채권자는 더 가혹하게 다루어 주기를 바라며 ‘권력자’입장에서 쾌재를 불렀을 것이다.

수잔 손택(Susan Sontag)의 ‘타인의 고통’

언급한 나의 체험처럼 당사자에게는 견디기 힘든 고통이라도 바라보는 족속들은 ‘일시적인 진부한 유흥거리’로 폄하해 버리는 역행지각을 이미지(Image)를 통해 고발하고 있는 역작이다.

대부분의 이미지가 주는 메시지, 특히 전쟁이나 폭력과 같은 고통을 담은 사진은 도덕적, 혹은 교훈적 의미를 주고자 하는 것이지만 실제로 타인들은 이를 보고 하룻밤의 유흥거리로, 혹은 대리만족으로, 혹은 관음적이고 말초적인 흥밋거리로 전이(轉移)하고 있음을 고발하고 있다. 더 나아가 타인의 고통은 하나의 소비대상 내지는 스팩터클로 전락하고 있다는 우려도 담고 있다.

그 이유를 저자는 과잉 생산되는 사진과 반복되는 사건으로 인해 ‘타인’의 경각심을 무디게 하고 더불어 이를 즐거움 혹은 소비대상의 소재로 삼게 된다는 점을 든다. 또한 극적인 장면을 당사자의 체감고통과 상관없이 ‘타인’들에게 흥미를 주려는 제공자들이 변조된 이미지를 양산하고 있다는 점도 지적한다.

1987년 11월 29일 미얀마 상공을 비행중이던 KAL기 폭파사건의 사진을 보고 사람들은 유족들의 아픔과 희생자들에 대한 추모보다는 “비행기 타고 여행이나 다니는 부자들에 대한 시원함”으로 회자됐다.

1993년 7월 26일, 목포공항의 아시아나 추락사건에서 한 장의 사진은 세인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긴급 구조되던 한 여인의 반라사진이 신문에 실린 것이다. 이 역시 ‘타인’들은 사선을 넘나드는 당사자의 고통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의 이름이나 사는 곳, 몸매”등에 더한 관심을 보였다. 결국 언론은 이러한 역반응을 의식해서 문제의 사진을 싣거나 방송하지 않기로 했다. 물론 일부 언론은 그 여인이 결혼한 30대 초반이며 강동구에 산다는 것까지 친절하게(?) 알려주긴 했지만…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사건당시 11일이상 생존한 최명석, 유지환 등 두 젊은이는 마치 그들의 아픈 상처를 반복해서 기억하게 하려는 듯 방송은 출연을 반복해서 요청했고, 기업들이 앞다퉈 홍보를 위해 스카웃하려는 바람에 한동안 곤욕을 치러야 했다. ‘타인’들에게는 두 청년의 고통을 ‘상품가치’로 계산한 것이다.

연예인 김현경과 황수정. 그들의 사진은 자신들의 의사나 고통과 무관하게 ‘타인’의 관음증적 욕망을 충복시켜 주는 촉매제가 됐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에서 보듯이 ‘타인의 고통 이미지(Image)’는 그 본질이라 할 수 있는 ‘고통에 대한 계몽이나 경각심’과 결코 비례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19세기초 화가 고야가 프랑스지배에 맞선 스페인사람의 봉기를 진압하는 나폴레옹군인들의 잔악행위를 묘사한 동판화연작 ‘전쟁의 참화’부터 크로아티아 병사의 피 묻은 셔츠사진을 패션업체의 광고사진으로 활용한 사례는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특권을 누리는 무리와 고통을 받는 그들이 똑같은 지도상에 존재하고 있으며, 고도의 지식정보사회와 야만적 폭력이 공존하는 것은 오늘날 우리사회가 보여주는 아이러니다. 저자는 이 역설적인 세계에서 타자의 고통을 성찰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옹호하는 것은 지식인에게 부여된 당연한 의무라고 강조하고 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하여 저자는 “이 세계를 조작된 이미지를 통해서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 보자”고 제안하고 있다.

이형석(leebangin@gmail.com)

아래의 글은 2005년 고려대 특강후 일부 학생들에게 ‘타인의 고통’을 읽고 느낌과 자신의 의견을 리플로 올리도록 한 것입니다

김하철
내용인즉슨, 어떤 사건을 당사자의 체감고통과는 상관없이 ‘타인’들에게 흥미를 주려는 제공자들이 변조된 이미지를 양산하고 있는데 문제가 있다는 내용이었다. 본인도 이에 동감하고 있다. 이에 적합한 예가 될지 모르겠지만 요즘 유행하고 있는 이종격투기에 대해서 얘기하고 싶다. 필자도 이 스포츠를 처음 봤을 때는 잔혹하고, 난폭해서 비난을 일삼았다. 그러나 어느 순간엔가 한 두번 보게 되니 이는 더이상 잔혹하지도 난폭하지도 않게 됐다. 오히려 더 때리고, 피를 흘리고, 더 과격한 행동들을 원했다. 참 사람이란 간사하기 그지 없는 것 같다. 내가 아니면, 그 일은 나에게 유희가 되는 것이다. 남은 고통스러운데 그걸 지켜보는 사람들은 즐기고 있다는게 말이 되냔 말이다. 지금 이 시대에 절실히 필요한 것은 易地思之의 마음인 것 같다. ‘내가 만약 저 자리에, 저 상황에 있었으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을 말이다.(2005-11-03 오후 8:23:12)

양혜련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 타인의 생각은 고려하지 않고 그들의 고통을 단지 흥미 거리로 만들어 버리는 요즘시대를 반영한 글인 것 같다. 물론 신문도 많은 사람들이 읽지만 요새는 다음이나 네이버의 실시간 뉴스들로 사람들은 세상을 본다. 신문보다 더욱 자극적인 인터넷 뉴스는 타인들의 고통을 더욱 흥미꺼리로 만들어버린다. 예를 들어 작년에 김선일씨의 죽음은 사실 매우 고통스러운 사건이었다. 하지만 그 당시 검색순위 1위는 김선일씨가 죽는 동영상 이었다. 그를 추모하기보다는 바로 눈앞에 보이는 자극적인 사진과 동영상을 찾는 이러한 현상은 참으로 안타깝다. 나 또한 단지 눈앞에 보이는 흥미 거리가 아닌 내용의 내면을 들어다 볼 수 있는 눈을 길러야겠다.
(2005-11-05 오후 10:07:19)

김동현
우리 사회에서 언제부턴가 타인의 고통이 나의 유흥이 되어가고 있다. 그 사람의 고통과 슬픔을 함께 나누기 보다는 그것을 즐기고 있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사회가 그들의 고통을 소비대상이나 상품으로 전락 시킨 잘못이 있지만 이에 앞서 우리 의식에 문제가 있다. 중학교 때 쯤 나도 ‘빨간딱지’ 사건을 경험해 본 적이 있다. 그들의 비웃음과 거리낌 없는 행동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나는 그들에게 묻고 싶다. 그 때 행동들이 자신들의 가족이나 친지들에게도 그렇게 할 수 있는지를……. (2005-11-06 오전 12:24:46)

김대헌
우리 사람에게는 기쁨이 잇는 반면에 고통이 존재한다. 내가 고통을 받으면 고통을 주는 타인은 그것을 이용해 무언가를 얻으려는 심리가 바로 그것이다. 우리는 그런 일례를 ‘목포 아시아나 항공기 추락사건’, ‘삼풍백화점 봉괴사건’등을 통해 찾아 볼 수 있다. 특히 삼품백화점의 생존자들은 일약 스타덤에 올랐고 기업은 그 들이 격었던 고통을 하나의 상품화하여 이익을 챙기는데 이용되고 있다. 우리는 사건을 있는 그대로 사실적으로 보지 않고 거기에 다른 의미를 첨가하는 이상한 마법을, 이상한 요술을 가지고 있다.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거기에 나오는 부분적인 것만 피상적인 것만 보려 한다. 마치 이것은 ‘나무는 보지 않고 숲만본다’ 와 다를 바가 없다. 때로는 사실적으로 모든 현상 심지어 당사자의 고통을 객관적으로 바라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2005-11-06 오전 12:51:46)

이지혜 (2005-11-06 오전 2:21:48)
어떤 타인의 고통은 심적으로 물적으로 굉장한 통증을 수반하며 찾아온다. 하지만 그보다 그들이 견딜 수 없는 것은 타인이므로 자신은 고통을 배제한 자신의 흥밋거리, 혹은 이익을 위한 그들에게 가해지는 압박이다. 올바르지 않은 인식을 통한 타인의 고통은 또 다른 고통을 자아내는 것이다.
얼마 전 인터넷 기사에서 일본의 고등학생이 자신의 실험을 위해 독극물을 엄마에게 투여해서 살인미수로 경찰에게 잡힌 적이 있다. 그 후 조사한 학생은 현실감을 못 느껴서 했으며 약을 산 경위나 실험 경과와 결과 같은 것을 인터넷에 올렸다는 것이다. 아기들은 몰라서 잔인하다고 한다. 하지만 고등학생은 아무리 자신의 자아정체성이 완전히 정립이 되어 있지 않아도 기본적인 도덕 사항은 알고 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일어난 위와 같은 일은 타인의 고통이 그저 유희적이며 자신의 고통과 스트레스를 풀어내는 현대사회의 이면을 드러내는 것이다. 자신이 알게 모르게 그 실험대 위에 선다고 생각해보라. 정확한 인식을 통한 타인의 고통은 자신을 위함과 동시에 더 나아가 그들에게 자그마한 도움을 줄 수 있으며 정확한 타인의 고통을 인지 못해서 생기게 되는 사회적 문제들이 많이 사라질 것이다. (2005-11-06 오전 2:23:24)

장승훈
타인의 고통을 행복으로 느끼게 되는 것은 타인을 자신과 일체감을 형성하지 못한다면 당연히 발생하는 현상이다. 특히 주목해야 할것은 시각적인 고통, 타인의 고통에 대한 행복감의 반증이다. 고통은 글을 읽거나, 다른 사람에게 듣는 것보다 시각적일때 더 크게 느껴지게 된다. 따라서 더 큰 고통으로 다가온 느낌은 ‘나는 그런 고통을 안당하기에 오는 안도감(?)’에 의해서 작은 미소가 지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런 현실에 슬픈것은 타인과 나를 일치시키는 것은 예수님, 공자님, 부처님 등 신적인 존재로 대변되는 사람 말고는 없다는 것이다. (2005-11-06 오전 9:31:24)

강대승
타인의 고통의 자신의 즐거움으로 삼아 그곳에서 쾌락을 얻고 기쁨을 얻는 사람들이 늘어가고 있다. 몇가지 예들이 적나라하게 이것을 보여주고있는데, 이는 자신이 아닌 타인의 일이기 때문에 즐길 수 있는것이다. 자신에게 그런일이 닥칠 수도 있다는건 생각도 하지 못한채. 이러한 문제는 의식구조의 개선이 필요하다.
우리는 생각의 전환을 통해 이를 헤쳐 나가야 할 것이다. 남의 피를 보며 배부르다 생각하는 사회가 더이상 지속되어서는 안된다.타인을 배려하는 마음이 절실한 때이다. (2005-11-06 오후 8:16:04)

박성용
사회는 타인의 고통을 즐거움이란 이미지로 바꾸어 다수에게 제공해왔다. ‘아시아나기 추락사건’과 ‘삼풍백화점 사고’등에서 그것을 볼 수가 있다. 오래전부터 그랬고 고도의 문명사회라는 지금도 그러한 야만성은 존재한다. 우리는 이제 이런 조작된 이미지가 아닌 진실을 볼 줄 알아야한다. 타인의 고통을 즐기는 사회의 야만성은 O양 비디오사건을 통해 잘 볼 수 있다. 그녀의 사생활을 비난하면서도 사람들은 그녀의 비디오를 보며 쾌락을 느꼈다. 그녀가 비난받을 이유가 뭔가? 그녀를 그렇게 만든 이들과 그것을 즐겨본 우리 모두 공범일 뿐이다.
(2005-11-06 오후 8:47:00)

박주은
‘네티즌’이라는 말이 생기고 부터 남녀노소 불문하고 남의 고통에 얼굴없는 폭력을 휘두르고 있다. 요즘은 어떤 사건의 기사내용보다 기사아래의 소위 악성리플이라는 것이 더 주가 되어 부각되고 있다. 그 기사가 어떤 내용인지 떠나서 모두들 그 사건을 즐기고있으며 또 주제넘은 참견까지 잊지않는다. 자극적기사와 악성루머들….’사람을 두번 죽이는거예요 ‘이 유행어가 오늘따라 쓰디쓰게 느껴진다. (2005-11-06 오후 10:57:23)

박진아
언론이 만들어낸 이미지를 보다 비판적으로 보아야 한다는 사실에 동의한다. 그것은 때로 조작되고 변질되었을 수 있으며 그로인하여 우리는 보다 실제적인 것을 분간하지 못한다. 타인의 고통이라는 단어가 눈에 와 박힌다. 자신이 아닌 타인의 일이기 때문에 쉽게 생각하고 변질되었을 가능성 조차 무시하는 것, 요즘같이 모든게 쉽게 조장되는 사회에서 모두가 한번쯤 심각하게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일 것이다. (2005-11-07 오전 12:01: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