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각의 명암

어느 날 해외토픽에서 기억을 잃지 않는 한 여성이 소개된 적이 있다. 이 여성은 수십 년 전 일도 날짜만 대면 그날 어떤 유명인이 사망했는지, TV 드라마의 내용이 무엇이었는지, 국제 분쟁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어떤 비행기 추락 사고가 있었는지 정확히 말할 수 있으며 또 그 시각 자신이 했던 일과 그날의 날씨까지 기억해낸다고 신문은 전했다.

이렇게 기억력이 좋은 사람이 부러울 때가 있다. 중요한 시험을 치러야 한다거나 업무상 만났던 사람을 기억해야 하는 경우, 그리고 지나간 일을 기억하지 못해서 정신적, 물질적 피해를 봐야 하는 경우 등이다. 모든 사람들이 이렇듯 장기기억(long-term memory)을 할수 있다면 아마도 세상은 그만큼 거짓말을 덜 하게 되서 더욱 밝은 세상이 될른지도 모른다.

하지만 대부분의 인생사는 잊어버리는 것이 더욱 좋을 때가 있다. 기억하고 싶지도 않을 만큼 쓰라린 옛 시절의 가난, 상처만 깊게 남기고 끝나버린 사랑, 비위를 심하게 거슬리게 했던 음식 맛이나 역겨운 냄새, 낙오됐을 때의 서러움, 조롱하듯 해괴한 웃음을 보여준 사람의 얼굴, 심한 고통을 주었던 수술 등 잊고 살아야 좋을 일들이 기억하고 살면 좋은 일보다 더 많기 때문이다.

만일 망각하지 않고 살아간다면 중요한 시험에서 낙방한 사람은 다시는 시험을 치루지 않을 것이고, 실연의 아픔을 느낀 사람은 다시는 사랑을 만나려 들지 않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본의 아니게 역겨운 음식을 먹었던 사람은 음식을 먹을 때마다 겁나서 쉽게 수저를 들지 못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망각은 참 좋은 것이다.

이제 또 새로운 한해가 시작된다. 사실 12월 31일과 1월 1일은 기호학에서 보면 단순히 다른 기호일 뿐이고, 시간으로 보면 단지 하루를 건너가는 것 뿐이다. 그 하루라는 것도 인간이 편리함을 위해 서로 약속한 기호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연말과 연초라는 이름으로 여기에 큰 의미를 두고 살아간다.

혹자는 보다 나은 삶을 위하여, 혹은 더욱 성공하기 위하여 새로운 각오를 다지는 기회로 삼기도 한다. 그런데 ‘보다 나은 삶’이나 ‘성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고민은 별로 하지 않은 것 같다. 어쩌면 해답이 너무 간단하기 때문일런지도 모른다. “돈을 많이 벌기 위해서”라고…

만일 그게 정답이라면 아프카니스탄같은 사지를 스스로 걸어 들어가 선교하는 사람들이나 행상을 하면서 기부를 꾸준히 하는 할머니들이나 쥐꼬리만한 수입으로 연명하면서도 마이너리티 연극인으로 비지땀을 흘리는 젊은이들은 아주 불행한 삶을 살고 있는 것으로 보여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만족도나 행복감은 여느 부자들 못지않게 풍요롭다.

올해는, 아니 매번 반복해서 돌아오는 여러 해 중 한해만큼은 돈버는 일보다 ‘마음의 풍요(ripeness)’에 대해 고민해 보는 것은 어떨까? 80평생 중에서 단 한해만이라도 돈을 떠난 삶의 가치에 대해 생각하는 성숙한 시간을 갖는 것은 남은 인생을 보다 윤기 있게 사는 좋은 기회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2008년의 나쁜 기억은 이제 기억 속에서 지워버리고 지금까지 최선이라고 믿었던 ‘돈 많이 버는 일’도 한해쯤은 망각에 묻어버리고 내면의 가치에 중심축을 세워보는 것은 어떨까? 이 글을 쓰는 동안 경찰을 하는 조카로부터 문자가 왔다. “새해 부자되시고 복 많이 받으세요~ 꼭 부자되세요~” ㅠㅠ

이방인(leebangin@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