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돈속의 이방인

이방인…
나는 까뮈를 모른다.
단지 ‘이방인’ 작가로만 기억할 뿐이다.
그마저도 모르면 무식한 놈 취급을 받을테니까…

이방인…
내가 이방인이라는 닉네임을 사용하게 된 이유는 꽤 복잡하다.
하지만 간단하게 그 이유를 대라면 그냥 이방인이어서다.
이방인의 정체성은 Passenger다.
나는 단지 세상이라는 공간을 지나는 행인이라고 느끼기 때문이다.

한 때는 사회속의 일원으로 긍지를 가질 때도 있었다.
그러나 사람들로부터 그것은 단지 꿈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그러다가 또다시 사회 속으로 들어가 몸을 담궜다.
그렇지만 이내 배신감을 느껴 이탈했다.
참여와 이탈을 반복하며 그렇게 47년을 살았다.
지금? 지금은 이탈상태다.

인생…
그것은 한때 돈이 전부였다.
20대에 나는 돈에 눈이 어두워 한꺼번에 많은 돈을 벌어보리라 다짐했다.
하지만 그것은 착각이었다.
30대에 나는 돈보다 자기계발에 역점을 두었다.
그 결과 공인받은 성공한 사람으로 회자되고 있다.
그 속에는 가정, 자녀교육, 여행, 여유 등의 키워드가 담겨 있었다.
작년까지는 그랬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인생…
그것은 허무다.
돈과 명예도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는 지독한 허무다.
아니 지금은 과학이 아닌 철학이다.
건강이 아니라 사고이며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이다.

사랑…
예전의 그것은 핑크빛이었다.
울긋불긋한 단풍이었고 오색빛깔 무지개였다.
그러나 지금은 단지 산들바람이다.
너무 과하지도 않고 잔잔하지도 않은 적당히 부드럽고 시원하게 해주는 바람이다.

사랑…
그것은 조건부 거래가 아니었다.
그것은 종교가 필요한 것도 아니고 학력이 필요한 것도 아니었다.
말이 필요한 것도 아니며 자식이 필요한 것도 역시 아니었다.
그저 서로의 관심, 그것 하나면 족했다.

이상…
10대의 나는 판사가 되고 싶었다.
불의를 너무나 많이 보아온 탓일게다.
20대에 나는 경제로 눈을 돌렸다.
프레임에 갖힌 관료보다 동적인 사업가가 향후 세계를 이끌어 갈 것이라는 판단이 들어서다.
그 판단은 지금도 잘했다고 생각한다.

아픔…
어릴 적 예방주사를 맞을 때 ‘아픔이 이런 것이구나’라고 생각했다.
8살에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나는 아픔이 무엇인지 뼈저리게 느꼈다.
우느라 숨을 못 쉴 정도였고 그렇게 나도 죽을 뻔했다.
한번의 경험 덕분이었을까?
어머니가 가실 때는 별로 울지 않고 용케 잘 견뎠다.

아픔…
3살 위 누나가 부산의 한 병원에서 암으로 세상을 떴다.
너무 오래 떨어져 살아서였을까?
아니면 더 큰 아픔을 두 번이나 겪었기 때문일까?
짓누르기 어려운 슬픔이었지만 울음을 멈추는데 이틀이 걸리지 않았다.

통한의 아픔…
아내가 갔을 때 나는 땅이 꺼지는 줄 알았다.
총 맞은 기분이 이러지 않을까 싶었다.
내 몸을 가누고 있다는 것 자체가 부끄러웠다.
방법이 있다면 즉시 같이 가고 싶었다.
누나보다는 부모, 부모보다는 아내가 더 큰 아픔으로 다가왔다.

고통…
육체적 고통이 정신적 고통보다 더 아프다는 사람도 있다.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 그러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 나는 비교적 건강하다.
육체적 고통을 당하지 않아서 지금의 아픔이 더 고통스럽다고 말하고 있는지 모른다.
어쨌든 나는 헤어나지 못할만큼 지독한 아픔으로 여전히 하루를 보낸다.
각자 고통의 척도가 다르다는 것에 기대를 걸고 사는 것 뿐이다.
불가능할 듯 보이지만 언젠가는 잊고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함으로.

실망…그리고 기대
진의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을 때 크게 실망하곤 한다.
그러다가도 은연중에 언젠가는 제대로 이해해 줄 것이라고 기대한다.
호의를 전략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을 보면서 실망한다.
그러다가도 또 한번의 호의를 보내본다.
실망과 기대를 교차시키며 실타레 처럼 꿰어간다.
그러다가 급기야는 판단을 못한 나에게 실망하는 것으로 인연을 마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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